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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뭐든 다 배달합니다(김하영 지음)

by msh0512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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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겨울에 큰 아들과 배달 아르바이트를 며칠 한 경험이 있다. 큰 아들과 차 한대에 함께 탔다. 나는 운전만 했지만, 아들은 앱을 보며 배달 콜을 잡고 포장된 음식을 식당에서 받아 배달목적지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저녁시간에 두세시간씩 2~3일을 했던 것 같다.

설 연휴 전후였는데, 배민커넥트와 쿠팡이츠, 이렇게 두가지 앱을 와이프 계정으로 내 폰에 깔았었다. 아들도 자기 계정으로 두 앱을 깔았으니 총 4개의 앱을 동시에 보며 움직인거다. 나름은 꽤 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하는 아들과 함께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대학생활 중 해보게 될 "알바"에 대한 괜한 부담을 덜어주고자 한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알바를 아들과 함께 했었다는건 매우 뿌듯한 좋은 기억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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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다 배달합니다"

책 제목을 보고 그 표지를 보니 지난 겨울, 큰 아들과의 그 알바가 다시 생각났다.

글쓴이는 본업이 기자다. 이십 여 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퇴사를 하고 1년 여간 세계일주도 했단다. 그런 사람이 최근에 쿠팡 물류센터 picker, 배민커넥터, 그리고 대리운전기사를 직접 체험한 뒤, 소위 플랫폼 노동자의 현실을 책에 담았다.

읽기 쉽게 잘 쓴 책이다. 그럼에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니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일독한 후 크게 두가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전업이든 부업이든 "플랫폼 노동"을 해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글쓴이가 체험하고 분석한 내용이 꽤 참고할 만하다는 것이다.

막상 해보니 결코 만만하진 않은 일들이고, 각종 매체에서 언급되는 월 천만원 혹은 억대 연봉 등의 문구는 플랫폼 노동자들을 유혹하는 업체의 과잉홍보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당신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도 배민커넥터를 경험하고 난 후 쿠팡 물류센터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 책을 통해 정말이지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민커넥터의 경우 전기자전거나 오토바이로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글쓴이의 설명을 읽고 나니 오토바이는 그리 매력적인 수단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철저하게 부업으로 접근하려는 내 입장에선 전기자전거 배민커넥터나 쿠팡 물류센터 일용직은 아직까지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말이다.

둘째로, 글쓴이가 위의 세가지 일들을 체험해 본 후 기자의 시각과 문장력으로 써 내려간 4장 "플랫폼 노동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49. 수저계급론과 현대판 소작민들"이 압권인데, 현대판 소작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내 방향성과 노력이 흐려지고 헤이해질 때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탐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책에서, 현 시대의 회사원은 곧 노예와 같다는 누군가의 얘기에 크게 공감했었는데, 글쓴이의 현대판 소작민 얘기도 깊이 새길만한 내용임에 분명하다. "내 땅 한 뙈기"를 갈망하던 소작농처럼 지금 우리는 "내 집 한 칸"을 꿈꾸면서 오늘도 내일도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 소작농 마인드로는 답이 없다. 1인 기업가로서의 온라인쇼핑 창업은 그래서 내겐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글쓴이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지적하고 사회적 지능도 더 똑똑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모두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현대판 소작민에 안주하고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다짐을 할 뿐이다. 나한테는 이정도의 배움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내용 그대로를 인용해서 아래에 적는다.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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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수저 계급론과 현대판 소작민들

보다 과감한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의 원천은 역사 속에 있다. 다시 한 번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현재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평준화의 기회는 1950년에 찾아왔다. 6.25 전쟁 이전에 실시된 농지개혁이 주인공이다. 해방 직후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청 여론국은 1946년 8월 8,453명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에 뭐가 더 좋아?"라고 물어봤다. 70%가 "사회주의가 좋아"라고 답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가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고, 이 중 80%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내는 소작농이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권력을 잡자마자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지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이때 북한의 많은 지주들이 남한으로 넘어왔다. 설문에 "자본주의가 좋다"고 응답한 14%에는 남한의 지주와 월남한 북한의 지주가 섞여 있을 것이다). 내 땅 한 뙈기 있었으면 죽어 여한이 없겠다는 소원을 품은 소작농들이 사회주의를 동경한 것은 당연하다.

미 군정은 안 그래도 남한의 소작제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소작권 세습이 가능했다. 땅 주인이 매년 40~60%씩 소작료를 받아 갔지만 땅에서 소작인을 내쫓을 수는 없었다. 소작인 입장에서는 좀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워도 내 땅이다 생각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소작권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땅 주인이 언제든 소작인을 갈아치울 수 있어야 우월적 위치에 설 수 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소작료는 70~80%까지 치솟았다. 소작농들의 삶은 비참해졌다. 무엇보다 대대손손 농사를 짓던 땅에서 쫓겨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초기 주된 항일운동 형태는 소작농들이 힘을 뭉쳐 싸우는 "소작쟁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9월이 되자 미군이 남한에 들어왔다. 미군이 보기에 소작료 70%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해 말 "소작료로 3분의 1(33%)을 넘게 받으면 안 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남한은 소작료를 낮췄지만 북한은 훨씬 강력한 정책을 썼다. 북한의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이 일어나자 농민들을 중심을 동요가 일어났다. 여론을 확인한 미군정은 일본인 지주에게서 빼앗은 땅에 대해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다만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해야 했다.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대신 싸게 파는 방식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1948년 8월 출범한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농지개혁을 이어 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인 지주들에게서 땅을 싼 값에 사들여 농민들에게 싼 값에 파는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을 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실시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미군정이 시작한 사업이니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고(미군정은 일본에서도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지주들이 모여 만든 정당인 한민당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북한과 본격적인 체제 경쟁의 막이 오른 때라 국민들 민심을 얻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승만은 정적인 진보당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을 맡겼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농지개혁은 한국사의 변곡점이라 할 만한 효과를 냈다. 땅값은 1년 수확량의 3배로 책정됐고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했다. 안 그래도 소작을 하면 매년 수확량의 33%를 내야 하는데, 원래 내던 소작료를 10년만 내면 자기 땅이 되는 것이다.

자기 땅에 농사를 지으니 수확량이 확 늘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원래 지주가 종자와 농기구도 사주고 비료도 대주고 했는데, 그걸 스스로 하려니 종잣돈(말 그대로 종자를 살 돈)이 부족한 농민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농지개혁을 시행하자마자 6.25 전쟁이 터져 농사를 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전쟁으로 물가도 치솟았다. 반대로 미국에서 밀가루 같은 원조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농산물 가격은 폭락했다. 꿈에도 그리던 내 땅을 가졌지만 벌이는 쉬 나아지지 않았다.

당장의 생산량 증가 효과는 미미했지만 그래도 70%의 소작료를 내던 때에 비하면 살림살이는 나아졌다. 무엇보다 경제 외적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농민들은 먼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도 있고 "부자는 3대를 못 넘긴다"는 말도 있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부자는 3대에서 끝난다는 말이다. 이 말이 어떻게 나온 말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과거제도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런데 공식적인 신분 구분은 "양천제" 즉, 양반과 노비 둘 뿐이었다. 양반은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직을 맡는 이들을 뜻한다. 농사를 짓던 평민들도 원칙적으로는 과거시험을 봐서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양반 집안도 후손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평범한 농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신분이 세습되고 토지 소유관계가 정립되면서 신분제는 관직의 유무가 아니라 지주와 소작농 관계로 굳어졌다.

1894년 공식적인 신분제는 폐지됐지만, 노비가 해방된 것이지 지주-소작 관계가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신분제는 1950년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으로 실질적으로 폐지됐다고 봐야 한다.

신분제가 사라지자 자식 키우는 부모들이 주목한 것은 "고시"였다. 과거제도는 958년 고려의 광종이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본따 만든 일종의 국가고시이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900년 넘게 이어져왔다. 조선이 망했다고 시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하며 "고등문관시험"이라는 일본판 과거제도를 갖고 들어왔다. 행정과, 외교과, 사법과로 나눠 뽑았는데, 이게 해방 후에도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법고시로 이어졌다. "고시 공화국"의 시초다.

"조선의 일본화"를 목표로 세운 일제는 조선의 아이들을 일본인으로 키우기 위해 근대식 교육기관도 들여왔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일단 학교에 다녀 고시에 합격하면 막강한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영의정을 지낸 무슨 어르신의 몇 대손이고 뭐고 이런 건 필요 없었다. 그저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만 보이면 됐다. "개천의 용" 신화는 일제 때 시작됐다.

해방을 맞이하고 땅을 갖게 된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 이승만 정권은 "초등교육 의무화"를 추진하며 무조건 초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부모들은 일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그중 잘하는 자식이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법고시 뭐든 하나 패스해 집안을 일으키길 꿈꾸며. 그렇게 한국은 개천에서 용을 기르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잔치는 1997년 끝이 났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고용의 신화는 무너졌고, 비정규직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기술 발전에 의한 구조적 실업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내적 모순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땅을 떠나 살 수 없는 농경시대 농부들처럼 현대인들은 일자리가 있는 도시를 떠나 살 수 없다.

도시의 주택은 농경시대 땅과 같다. "내 땅 한 뙈기"를 꿈꾸던 소작농들처럼 "내 집 한 칸"을 꿈꾸지만 점점 멀어지기만 한다. 집이 없는 도시민들은 집주인에게 임대료를 따박따박 내며 산다. 집이 있어도 은행에 대출이자를 내야 한다. 소작료와 뭐가 다를까.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임대료도 오른다. 은행 이자율이 낮아져도 대출금액이 커지면 이자 액수는 커진다. 소작료가 오르는 것이다.

"수저 계급론"도 등장했다. 천자문을 뗀 뒤 좋은 스승 밑에서 중국 고전을 공부하며 자란 양반의 자제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어 부와 권력을 누렸던 것처럼, "금수저", "은수저"는 어릴 때부터 과외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고 해외 유명 대학에 유학해 몸값을 올린다. 흙수저들은 그저 유리천장을 쳐다보며 "헬조선"이라며 한숨을 내쉴 뿐이다.

그나마 있던 일자리도 이앙기와 콤바인이 들어온 논처럼 사람을 일터 밖으로 내몰고 있다. 기술의 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낙오자들은 점점 늘어난다. 역사는 돌고 돈다 했던가. 소작농의 시대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1950년의 농지개혁과 같은 과감한 사회경제적 구조 변혁이 필요한 때다. 어쩌면 코로나는 전쟁과 국가붕괴, 혁명 이전에 찾아온 기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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